버스와 기차, 그리고 비행기 옆자리의 로망.

여행을 떠나는 건 언제나 설레임을 동반한다. 그 것이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짧은 여행이거나, 기약을 할 수 없는 긴 여행이라도 언제나 설레임을 가지게 하는 여행의 로망이 한가지 있다. 그 것은 바로, 버스와 기차, 그리고 비행기 옆자리의 로망이다.


어떤 운송수단을 이용하건 간에 혼자 이용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옆자리는 다른 사람이 와서 앉게 되어있다. 현실로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옆자리에 멋진 혹은 아리따운 이성이 앉기를 바란다. 두근대는 마음을 가지고 자리에 앉았지만, 실제로 내 옆에 앉는 것은 우람한 덩치의 아저씨, 호호백발의 할머니, 수다스러운 아줌마 등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앉는 경우가 다반사다.

[20km정도로 서행하는 기차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여행을 떠날때마다 누군가 맘에드는 이성이 내 옆에 앉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곤 한다. 혹시라도 내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하는 달콤한 로맨스는 누구나 꿈꾸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사실, 이런 환타지는 영화나 다양한 소설들의 영향이 크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기차역은 붐비고,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머리속에 가득찬 복잡한 일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떠난 여행. 난 딱히 생각할 것도 없이 가장 먼저 출발하는 기차표를 구입했다. 기차 요금을 지불하고 나니, 내 손에는 춘천행 기차표가 들려있었다. 어깨에 맨 작은 가방을 반대쪽 어깨로 돌려메고 플랫폼으로 향했다. 10분. 춘천행 기차가 떠나기까지 남은 시간이다.


기차에 올라타고 보니 기차 안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인지 10여 명의 대학생처럼 보이는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있는 덕분이었다. 나도 저랬던 적이 있었지..하며 피식 웃고 내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마침 창의 중앙에 위치해서 바깥 풍경을 보기에도 그만인 자리였다. 잠시 후, 덜컹거리며 기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익숙한 풍경. 이제 정말로 떠나는 느낌이 든다.


털썩.


누군가가 내 옆에 앉았다. 창밖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던 터라 깜짝 놀라서, 옆을보니 한 남자가 나를 보며 씩 웃는다.


“안녕하세요?”


덕분에 창밖을 보면서 시작된 나의 명상은 단 몇분도 가지 못해 퉁명스런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하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춘천 가시는 길이시죠? 전 춘천 처음 가보는거라 설레요.”


나의 무심한 반응에도 남자는 붙임성있게 말을 이어갔다. 이야기를 하면서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는 그의 표정에 복잡했던 나의 생각도 조금 누그러드는 것 같았다.

 

이런 플롯으로 시작되는 소설이나 영화를 본적이 많을 것이다. 물론, 위의 이야기는 지금 즉흥적으로 지어낸 이야기긴 하지만, 사실 어디선가 한번쯤 봤을 정도로 흔한 느낌이 아닐까. 영화나 소설에서는 버스를 타건, 기차를 타건, 비행기를 타건 어떻게 항상 멋진 이성이 옆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 로맨틱 코미디같은 영화라면 90% 이상의 확률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심지어 액션영화에서도 이런 일이 빈번히 일어난다. 뭐, 멋진 주인공에게는 멋진 여자가 따라오기 마련이지만.


아쉽게도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 역시도 온갖 교통수단을 다 타보기는 했지만, 영화와 같은 로맨스는 단 한번도 일어나 본적이 없다. 미국으로 향하던 비행기에서 씨름을 하는 것 같은 엄청난 거구 아저씨들 사이에 끼어서 10시간동안 제대로 숨도 못쉬어본 기억, 호주 그레이하운드 버스의 내 옆자리에 앉았던 아저씨의 미칠듯한 암내때문에 후각이 마비되었던 기억, 콜롬비아 산 아거스틴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닭 세마리가 든 상자를 든 할머니와 동행했던 기억 등 안좋은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기대했던 로맨스는 없었지만, 재미있는 일은 많이 있었다. 말레이시아 항공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앉았던 에콰도르 아저씨. 스페인어가 배우고 싶다는 내 말에 4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스페인어와 영어의 차이를 강의해주셨던 기억, 같은 여행지로 향하는 여행자라 죽이 잘 맞아 몇일동안 같이 다녔던 기억,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귀기울여 주던 콜롬비아 버스 안의 사람들과 이야기했던 기억 등 여행에서의 행복했던 기억도 많다.


물론, 아리따운 아가씨가 옆에 앉은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것이 모두 로맨스로 이어진다면 세상은 너무 살기 쉽지 않을까. 버스를 탔을 때 너무나도 이쁜 아가씨가 자기 옆자리에 앉아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이 들었을 때, 로맨스가 시작되는구나 하며 두근두근 거렸지만 실제로 그녀가 떠나고 난 뒤에 남은 것은 어깨 위의 흥건한 침이었다는 이야기처럼.. 세상사는 그렇게 쉽지 않다. 물론, 당신이 적극적인 사람이라면 또 달라질수도 있겠지만.


오늘도 또 짧은 여행을 떠나면서, 내 옆에는 누가 앉을까 하는 상상을 한다. 이 곳이 사랑이 시작되는 로맨틱한 장소가 될 수도 있는 곳이니까. 물론, 꼭 아리따운 이성이 아니더라도, 나와 죽이 잘 맞는 혹은 재미있는 사람이 앉기를 기대하기도 하고. 이러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은 여행자에게 주어진 즐거움이자, 로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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